전자·반도체·로봇 한자리에…정부, ‘한국판 CES’ 판 키운다
국내 산업 전시회를 세계적인 규모로 키우기 위해 정부가 전시회 간 연계와 통합을 추진한다. 전자·반도체·로봇·인공지능(AI) 분야의 주요 전시회를 하나로 묶어 이른바 ‘한국판 CES’를 조성하고, K뷰티와 K푸드 전시회에는 공연과 쇼핑, 관광을 결합해 해외 바이어와 관광객을 동시에 유치한다는 구상이다. 개별 전시회 중심의 운영 방식에서 벗어나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과 핵심 공급망을 한자리에서 보여주고, 국제적인 거래와 산업 교류가 이뤄지는 플랫폼으로 발전시키겠다는 목표다.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막한 ‘한국전자전’에서는 산업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로봇 기술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LG전자 부스에는 자율 이동 협동 로봇 ‘LG 모마(MoMa)’ 3대가 배치돼 실제 작업 환경을 재현했다. 바퀴가 달린 직육면체 형태의 몸체에 로봇 팔을 결합한 모마는 산업 현장에서 여러 작업을 수행하도록 설계됐다.
전시 현장에서는 작업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 안전모를 벗자 순찰하던 모마가 이를 카메라로 감지하고 빨간색 경고 알림을 표시하는 장면이 시연됐다. 작업자가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은 상황을 로봇이 인식해 경고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제품의 외형이나 기능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로봇이 실제 제조 현장에서 작업자의 안전 관리와 생산 공정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보여준 것이다.
이튿날인 14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제28회 반도체대전(SEDEX 2026)’에서는 로봇과 AI 시스템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 기술이 소개됐다. 삼성전자는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인 ‘HBM4E’의 내부 구조를 나타낸 모형을 선보였으며, 차세대 낸드플래시 기술인 ‘zNAND-O’도 전시했다. zNAND-O는 여러 낸드플래시 칩을 수직으로 쌓아 속도와 전력 효율을 높이는 기술이다.
전자제품과 로봇 완제품부터 이를 작동시키는 반도체까지 관련 기술을 연이어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산업 전시회의 연계 효과도 주목된다. 해외 바이어와 관련 산업 종사자들은 개별 제품뿐 아니라 제품의 성능을 뒷받침하는 핵심 부품과 제조 기술까지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이 글로벌 빅테크의 초고성능 AI 모델 자체를 놓고 경쟁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반도체와 제조 장비, 로봇 등 산업 공급망에서는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을 반영한 사업이 정부가 추진하는 ‘K 커넥트 AI’다. 정부는 한국전자전과 반도체대전에 이어 오는 21일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산업AI 엑스포’와 ‘아시아기계·제조산업전’을 연계 개최한다. 이들 행사에서는 로봇과 반도체, AI 기술이 적용된 스마트 공장을 선보일 예정이다. 다음 달 4일에는 ‘로보월드’를 통해 사람처럼 움직이는 휴머노이드 로봇을 전시한다. 각각 열리던 산업 전시회를 연결해 기술과 산업 간 관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 핵심이다.
정부는 14일 ‘전시 산업 발전 로드맵 2030’도 발표했다. 2030년까지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갖춘 국가 대표 전시회를 5개 이상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는 한국 제품을 한자리에서 살펴보고, 기업 간 거래와 산업 협력을 확대할 수 있는 대형 전시회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반영했다.
우선 전자·반도체·로봇·AI 분야 전시회 5개를 2029년부터 한곳에 모아 ‘한국판 CES’로 발전시키겠다는 방침이다. CES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전·정보기술 전시회로, 신제품과 미래 기술을 공개하는 동시에 글로벌 기업과 투자자, 바이어가 교류하는 무대로 활용된다. 정부는 국내 전시회도 여러 산업의 기술을 연결해 보여주는 방식으로 규모와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올해 진행되는 K 커넥트 AI 연계 개최는 이러한 통합 전략의 첫 단계로 볼 수 있다.
산업 분야뿐 아니라 K뷰티와 K푸드 관련 전시회의 국제화도 추진한다. 정부는 관련 전시회에 K팝 공연과 쇼핑, 관광을 결합해 해외 바이어뿐 아니라 일반 관광객까지 유치할 계획이다. 봄철 서울스프링페스타와 가을 코리아세일페스타 등 기존 행사와 전시회를 연계하는 방식도 검토한다. 산업 제품을 소개하는 공간에 문화와 소비 경험을 더해 한국을 방문할 이유를 확대하겠다는 취지다.
국내 전시산업은 매출 규모에 비해 대형 국제 전시회의 비중이 낮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2024년 국내 전시산업 매출은 약 4조400억원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개별 전시회 규모를 보면 소규모 행사가 다수를 차지한다. 2024년 국내에서 열린 전시회 736건 가운데 약 70%인 514건은 전시 면적이 1만㎡ 미만이었다. 다양한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지만, 세계 각국의 기업과 바이어가 집중적으로 방문할 만한 대형 행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주요 산업 전시회의 외국인 관람객 비율도 해외 대표 전시회와 비교하면 낮은 수준이다. 생산제조기술 전시회인 심토스(SIMTOS)는 전체 관람객이 약 10만명에 달하지만 외국인 관람객은 약 5000명으로 전체의 5% 수준이다. 의료기기 전시회 키메스(KIMES) 역시 전체 관람객 약 7만5000명 가운데 외국인은 약 5500명으로, 비율은 7%가량이다.

반면 독일 하노버 메세는 전체 관람객 약 12만명 가운데 외국인이 약 5만명으로 42%를 차지한다. 미국 CES도 전체 관람객 약 14만명 중 외국인이 약 5만명으로, 비율이 36% 수준이다. 이들 전시회는 해외 기업과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국제적인 산업 교류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국내 전시회가 참고할 사례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외국인 바이어들이 한국을 직접 방문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품을 전시하고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글로벌 기업과 바이어의 지속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기술을 공개하는 것과 함께 산업의 미래를 논의하고 기업과 연구기관, 정부 관계자들이 협력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전시회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독일 하노버 메세는 이러한 사례로 거론된다. 이 전시회에서는 매년 신기술을 선보이는 동시에 기업과 연구기관, 각국 정부 관계자들이 모여 세계 제조업의 변화와 발전 방향을 논의한다. 제조업 혁신 전략으로 알려진 ‘인더스트리 4.0’ 개념이 소개된 무대 역시 하노버 메세였다. 제품을 보여주는 데서 더 나아가 산업 전반의 의제를 제시하고 관련 주체들이 교류하는 기능을 수행해 온 것이다.
정부의 전시산업 육성 계획이 성과를 거두려면 단순히 행사들을 한곳에 모으는 것 이상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산업 간 연계가 실제 바이어의 구매와 기업 간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전시 콘텐츠를 구성하고, 해외 기업과 전문가가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K뷰티와 K푸드 전시회 역시 공연과 관광을 결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제품을 실제 구매하고 유통할 수 있는 사업 기회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는 전시회 통합과 산업·문화 콘텐츠의 결합을 통해 국내 전시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한국전자전과 반도체대전, 산업AI 엑스포, 아시아기계·제조산업전, 로보월드 등 주요 행사를 연결하면 한국의 AI·반도체·로봇·제조 역량을 종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향후 관건은 전시회의 규모를 키우는 것을 넘어 해외 관람객과 바이어의 참여를 확대하고, 실제 수출과 투자, 기술 협력으로 이어지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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